[직딩일기 33-2-1]동방예의지국의 부흥을 위하여
10분 쉬는 시간에 달려와 손을 건네며 명함을 주는 분이 있다. “선생님 말씀중 진짜 천자문이 걸작이네요. 그런데 그런 천자문을 ‘걸자’(乞字) 천자문이라고 합니다. 글자를 천명에게 구걸하여 만든 것이니까요” “아, 예. 고맙습니다” “예전에 할아버지들이 주로 향교를 돌며 손자 돌상에 올리려 걸자천자문을 만들었지요. 수년전 매국노 이완용의 ‘걸자천자문’이 고서점에 나와 경매붙은 적이 있습니다. 그 외할아버지가 천명에게 글자를 받았다지요. 하지만 그런 정성도 아랑곳,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어요” “아, 예. 다음시간에 알려드리지요. 일제때 징용, 징병 끌려가는 남편을 위하여 1천명에게 한뜸 한뜸 뜨게 하여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자를 새긴 천인침(千人針)이라는 것을 저도 어릴 적 본 적이 있어요. 아무튼 옛사람들의 정성은 못말리는 게 있지요”
‘유교와 시의 만남’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또 하나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김수영의 ‘풀’. 논어 안연편에 보면 계강자가 공자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엄벌백계’를 하면 정치가 잘 되지 않겠느냐고 묻지요. 공자는 그럽니다. “어찌 공포정치를 하려고 합니까. 사회지도층이 착하게 살려고 하면 백성도 착하게 살지요. 군자의 역할은 바람과 비슷하고 소인의 역할은 풀과 비슷하지요.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드러눕지 않나요”(子爲政 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之人德草 草上之風 必堰)라고 말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자는 한 사회의 계층을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합니다. 군자는 주도적 계층으로 모범을 보이고 소인은 그 모범을 복사하는 추종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드러눕다(堰)고 했겠지요. 그러나 김수영의 풀은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갑니다.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또 먼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풀은 자유자재로 울고 웃는 존재지요. 의미하는 바는 틀리지만, 자연현상을 관찰하면서 생각을 빗댄 것은 고금(古今)이 다를 바가 없지요.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흘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어쨌거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동방예의지국에 대해서 말입니다. 실제로 2500여년전 공자가 동이(東夷)는 군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고 말년에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술회를 합니다. 자기의 뜻을 아무리 펼래도 알아주는 곳이 없이 16년동안 수레나 타고 다니고 허송세월을 했으니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인불지이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慍不亦君子乎) 아닙니까?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할 정도로 학구열에 불타던 성인 공자가 어찌 동이에서 살고 싶다고 했을까요? 당시 동이는 대단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문헌에서 살펴봅시다. 공자의 후손이라는 공빈이 지은 ‘동이열전’에 그 구절이 나옵니다.
“옛날부터 동쪽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동이라 한다(東方有古國 名曰東夷). 지역은 조선 백두산에 접해있다(地接鮮白). 훌륭한 임금 단군이 나니까 9개 부족 구이가 그를 받들어서 요임금과 한때의 일이다(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竝立). 우순이 동이에서 나아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훌륭하게 다스리니 묻 임금 위에 우뚝했다(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중략)......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않았고 그 군대는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入國). 풍속이 순후해서 다니는 이들이 길을 양보하고 먹는 이들이 밥을 미루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니 동쪽에 있는 예스러운 군자의 나라라 하겠다(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후략)”
이같은 기록은 중국 사서에 무수히 나옵니다. 지금 동북공정이라고 역사왜곡을 하고 있지요. 그들은 자기들 조상을 통째로 부정하는 망나니짓을 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에서는 논란거리되는 것은 다 차치하지요. 순임금이 동이사람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나요? 정작 중국에서는 동이사람이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무슨-’ 그러고 맙니다. 개탄할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월드컵때 ‘붉은 악마’들이 어떻게나 기특하던지요. 이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 어떻게 ‘치우천황’을 찾아냈습니다. 치우천황은 우리 민족이 두고두고 자랑해야 할 전쟁의 신입니다. 중국의 헌원황제를 탁록전투에서 크게 혼쭐낸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지금도 중국에서는 치우천황의 형상을 가면처럼 만들어 대문앞에 매달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인물을 우리는 역사속에서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각설하고, 이 글에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르는 세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행자양로 식자추반 남녀이처이불동석”(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길을 가는데 사람들을 만나면 남자나 여자나 먼저 본 사람이 길을 양보하는 것이 ‘행자양로’입니다. 우리 어릴 적만 해도 동네어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동네어른을 만나면 얼른 자전거에서 내려 인사를 하곤 했지요. 지금은 자가용을 타고 쉭쉭 지나가버리지만요. 밥을 먹는데 상대방에게 먼저 드시라고 말하고 거지가 오더라도 항상 꼬마상에 밥을 챙겨주던 것 많이 보셨을 거예요. 이게 먹는 이들이 밥을 미룬다는 ‘식자추반’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는 따로 거처해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게 ‘남녀이처 이불동석’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남녀공학학교를 폐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인데 ‘남녀7세부동석’을 고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구요. 다만 옛조상들의 생활태도나 방식에 대해선 정확히 알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활예절을 바탕으로 풍속(風俗)이 순후(淳厚)한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공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군자가 사는 나라는 더럽고(陋) 누추하지 않다는 것을요. 어떻습니까? ‘소학’(小學)에 보면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동이에 대련-소련(大連-小連) 형제가 살았지요. 부모상을 당하자 삼년상를 치릅니다. 그것을 보고 공자가 극구 칭찬합니다. 왜 3년상을 치르냐구요?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는 등 3가지 큰일을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3살까지는 키워야 걸음마도 떼고 사람구실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느 부모고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우지 않나요. 그래서 최소한 3년동안 부모님 은혜를 기리는 것이지요. 물론 요즘 세상에 어디 3년상이 가당키나 하나요. 49재만 정성껏 치러도 효자효부소리 듣지요. 3년상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을 고집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알 것은 제대로 알고 넘어가자는 말입니다. 알아서 남 줍니까? 아는 것하고 모르는 것하고는 백지장 한 장 차이지만 생활적인 측면에서는 천지차이입니다. 결코 모르는 게 능사(能事)가 아닙니다.
아하,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를 공자가 동방예의지국이라 부른 것이었구나. 아셨습니가? 예절이란 이렇게 생활속의 사소한 것들이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함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법대로 하자”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상식화된 법이 아니지요. 예절은 법(法)입니다. 또한 예절은 버릇입니다. 무례한 사람을 “버릇없다”고 하죠. “지 애비 욕보일 놈”이라고도 하죠. 왜냐하면 법은 우리가 약속해놓은 생활방식이기 때문이죠. 예절이란, 예의란 바로 법이고 버릇입니다. 시쳇말로는 ‘싸가지’라고 할 수 있겠죠. 한마디로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 생활규범입니다.
이런 예절이 나라의 교육정책상, 근대화의 빠른 진척으로 무시되고 경시되어 이제는 ‘힘이 곧 법이고 정의(正義)인 세상’이 되었으며 ‘돈이면 최고’라는 극단저인 천민자본주의로 치닫고 있죠. 이제 살부(殺父:부모를 죽임)도 낯설지 않으며 노부모 방치등 예절이 땅에 떨어진 세상으로 내달리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동방예의지국 얘기만 하려고 해도 끝도 갓도 없습니다. 어디 공자만 동이를 칭찬한 줄 아십니까? 아성(亞聖)인 맹자는 어떻구요? 삼강오륜(三綱五倫)할 때의 오륜도 우리 동이민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요? 우리는 그만큼 민족적 자긍심이나 자존심이 오그라붙을대로 붙어 진실도 호도하고 왜곡하고 믿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아셨으면 어깨 좀 활짝 펴고 ‘에험’ 큰소리 한번 칠만하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은 진짜 ‘뭔가’가 있는 민족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피를 타고난 흑인소년이 저처럼 훌륭하게 커서 미국 전역을 ‘영웅 신드롬’을 일으키며,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금 비록 휴전선으로 민족이 두동강나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지만, 5천년 역사로 볼 때 ‘이까짓 50년’은 포말(泡沫)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독립된 우리나라의 청사진을 첫째 ‘문화선진국’으로 잡았습니다. 일본처럼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강대국이 아닙니다. 미국처럼 세계경찰국가를 내세우며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를 만들고자 만주벌판에서 허위허위 고생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백범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본받을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을. 어쩌면 그 민족적 혈통은 5천년동안 이렇게 흘러옵니까? 정말 흐뭇하지 않습니까? 시인 김지하는 80대초 감옥에서 나오면서 일성을 내지릅니다. “21세기는 우리 한민족이 근사한 문화선진국이 될 것을 확신한다. 정치적으론 잘 모르겠다”고 했지요. 예지(叡智)있는 분들은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 결코 동방무례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머지 않아 ‘예절나라’의 꽃을 피울 거라는 것을. 단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대에 맞는 업그레이되고 문명화된 예절을 찾아야겠지요. 어떻게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 ‘한국에는 한국이 없다’ ‘이 나라는 온통 비례, 결례, 무례가 판친다’는 말을 들어야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절을 알고 실천하는 나라, 염치를 아는 나라, 그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한 몫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는 ‘동이‘라고 할 때의 이(夷)자가 죽어도 ’오랑캐 이‘자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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