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시간을 내어 오후 근무시간중 대학로에 있는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선생을 찾았다. 언제까지나 열혈청년일 줄 알았던 백선생도 이젠 나이가 드신 모양이다. 전날 온양 순천향대학교 초청특강을 다녀온 후 얼굴에 피곤이 역력하다.
대뜸 어제 강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교장단에서 불러 갔는데, 강의 서두에 ‘미국의 폭력’에 대해 말하니 몇 분이 나가더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더 큰 폭력이 무엇이겠냐’며 ‘강의실을 나가는 저 사람들은 나를 왜 불렀으며 왜 나가느냐’는 거였다. 그 분의 말씀은 국제경찰을 자처하며 한반도 분단을 획책하고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 폭력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말인즉슨, ‘작은 폭력’을 미워하고 발본색원하는 것도 좋지만, 따질 것은 따져보자는 것인데, 뭐가 나쁘냐는 것이다. 부시는 부셔(敵의 우리말)야 한다는 데 한심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다가 화제에 오른 것이 문학하는 사람들의 나약함과 사대주의경향와 부정확성에 관한 것이었다.
“최부장, 거 김광균인가 하는 시인이 지은 설야(雪夜)라는 시를 아나?” “네. 알죠.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맞아. 그런데 나같으면 그렇게 나약한 시는 안짓겠어. 제목도 ‘눈오는 밤’이라고 하면 좀 좋아. 가로등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와사등이라고 하고 말야. 문풍지를 찢어 조그만 사각유리를 붙여놓고 추우니까 빼꼼히 내다보면서 뭐 여인의 옷벗는 소리 운운하고 말야, 쩨쩨하게. 호남평야 들길을 따라 퍼붓는 눈속을 헤치며 벙거지 하나 둘러쓰고 어깨를 편 채 뚜벅뚜벅 발걸음을 재촉하며 큰뜻 펴려고 먼 길 떠나는 사나이의 심정을 담아야, 쓸만한 시라는 말이야”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디찬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아, 예. 그렇지요” “그리고 말야,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 있지, 왜. 그 청포도도 문제야. 내 생각엔 청포도는 우리나라 것이 아닐 거야. 하얀 모시옷 입고 은쟁반에 어쩌고 하는데, 엄혹한 일제시절에 그런 호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청포도는 당연히 머루 다래가 돼야 하지 않겠어. 물론 이육사가 애국투사이고 바라는 손님이 광복일지는 모르지만 말야. 산비탈 아무 데나 흔하디 흔한 새까만 머루와 다래가 진정 우리 것이 아니겠어. 나 정말 요즘 젊은이들이 머리를 노랑 빨강 색색이 물들이는데, 못봐주겠어. 새까만 머루 다래머리 얼마나 좋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횐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많이 써 유명한 정지용의 향수 좀 봐.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어쩌고 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엔 얼룩배기 황소가 어디 있냐는 말야. 조선 천지에는 누렁소뿐이었단 말야. 얼룩배기 황소(점백이)는 젖소 아니냔 말야. 서양 것을 무조건 선(善)인양 여기고 익숙한 탓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워”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 제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아, 예. 그래서 정태춘이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동무하여 걸어라’라고 노래했군요. 저도 어릴 적 얼룩배기 황소는 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요. 누렁소였지요. 선생님 지적을 들으니까 일리도 있고, 마침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가 생각나네요.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30년대 조선민중들에게 ‘술 익는 마을마다‘라니요. 정말 세상현실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 아니냐고 어떤 평론가가 비평한 글이 생각납니다. 술 해먹을 누룩이나 쌀 있으면 허기진 배를 채웠을 것 아닌가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맞아.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요, 선생님. 그런 시각으로 보면 미당 서정주 시에도 그런 것은 많아요” “그렇지. 내 말은 문학은 현실에 대한 투철한 시각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거야. 지엽말단적인 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는 얘기지”
"그리고 최부장 말야. 자네가 지난번 준 책 '백수의 월요병을 다 읽었네" "아니, 읽지 마시라면서 드렸잖아요. 아이구 이거 미치겠네"
"그런데 배포를 크게 가져야하네. 쩨쩨하게 몇개월 놀았다고 울고짜고 할 일이 아니란 말일세. 자네 글재주와 감수성은 탁월하더군. 그런데 눈을 높이 치켜뜨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일세. 한 방향을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일세. 그런 말도 있잖은가. 높이 난 갈매기가 멀리 본다고. 그리고 고독하다는 얘기를 자주 하던데, 고독, 외로움이란 것은 말이야. 가치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면 이겨나갈 수가 있는 거야. 그래도 안되면 한 밤을 꼬박 새워보게. 그리하여 여명이 트고 아침해가 동산에 불쑥 솟는 모양을 보면 외로움은 천리만리로 달아나고 만다네"
이거야말로 심약한 나의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가 아닌가. 그렇다. 선생은 다음주 진해에 특강을 가시는데, 제목이 '아름다운 삶과 거룩한 가치관'이라는 말도 들려주었다. '고귀한'도 아니고 '거룩한'이다. 거룩한 가치관, 이거야말로 내 삶의 최고의 화두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후 몇 시간 땡땡이를 쳤을 망정 나는 삶의 지혜화 슬기를 배운 보람된 시간이었다.
일요일 아침, 눈이 내린다. 사부적 사부적 내리는 눈을 보노라니 마음은 어느새 내 고향마을로 달린다. 우리 고향은 세세년년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인데, 올해는 유난히 근 열흘을 쏟아내렸다고 한다. 어느 해는 순식간에 바람과 함께 퍼붓은 눈이 또랑을 덮어버렸다. 길이 없어진 길을 걷다가 또랑에 빠졌더니 눈이 허리까지 차 기어나오는 데 애를 먹은 기억이 있다. 물론 키가 적어서도 그랬겠지만, 그 시절로 딱 한번만 돌아가 봤으면 좋겠다. 갑자기 눈으로 흠씬 뒤덮인 고향에 가고 싶다. 고월 이장희라는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는 아침이다. “눈 내리는 아침은 기도하고 싶어라“ 그렇다. 예수꾼도 아니고 재가불자도 아니면서 기도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하염없이 기도하고 싶었다.
눈은 역시 함박눈이 최고다. 진눈깨비는 가라. 장독대에 소복소복 쌓이는 함박눈이 보고 싶다. 이제 언제나 이런 함박눈을 볼 수 있을는지. 도시의 눈은 추하다. 눈곱만큼 쌓인 눈도 녹느라고 지저분하기가 말도 못한다. 어디 정감있는 장소가 없다. 오후에는 고궁에나 가보면 어떨까. 애인하고, 아니 아내하고 손잡고 눈덮인 고궁을 걷고 싶다. 천천히, 천천히. 가끔씩 입가에 부딪치는 눈을 혀를 내밀어 먹어본다. 차다. 그러다가도 달콤하다. 고향의 눈은 얼마든지 배 터지게 먹어도 좋다. 도시의 눈은 어쩐지 먹기가 찝찝하다. 고향의 눈은 온통 추억뿐이다. 도시의 눈은 눈씻고 봐도 추억 한 조각도 없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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