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목, 금.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세미나실.
중학교 선생님 30명중에 뜬금맞게 내가 끼어 앉았다. 이른바 속기지도사 양성과정.
하루 5시간동안 속기(速記) 연습만 한다. 이론이야 원칙을 아는 수준으로 2시간이면 족하다.
인터넷시대에 웬 수기(手記)속기란 말인가? 시방 젊은 누리꾼들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도 1분에 400타를 친다던가. 키워드 자판도 1분에 600-700자는 보통이라지.
그런 21세기 벽두에 노익장(老益壯)을 자랑하는 77세의 할아버지가 필생의 사업으로 벌이는 게 ‘속기 보급운동’이다. 왜냐하면, 그 속기법을 5년여의 각고 끝에 젊은 시절(1956년, 당시 27세)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속기시장을 통폐합하여 ‘남천식 속기’로 실업고교 검인정 교과서로까지 발전했으며, 전국에 주산-타자학원만큼 속기학원이 성행하였고 국가자격 1급에서 7급까지 있었다한다. 전국을 돌며 수백차례의 특강을 실시한 게 20여년.
문득 식품가공사업에 투신, 갖은 고생 끝에 현미를 볶는등 가공법을 실용신안특허를 내어 음료수로 처음 선을 보인게 ‘보리텐’이었다고 한다. 이후 ‘아침햇살’ ‘하늘보리’등에 계속적으로 원료를 제공하여 돈도 원없이 벌었다던가. 4년전 일생을 되돌아보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웅진식품에 기업을 완전히 넘긴 후 ‘속기 보급운동’에 본격 나섰다. 당신이 죽어버리면 한글처럼 우수한 글자를 빨리 적는 속기기술도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겠구나 싶어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100% 사재로 연구소를 차리고 교재를 만들고 대학교에 교양선택과목으로 채택하게 하는등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서울시내 3개대학에서 2학점 교양과목으로 채택, 학생들로부터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고, 턱없이 부족한 지도사 양성과정에 나섰다. 주요 일간지에서도 이 선생님의 얘기가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준비의 치밀함, 식을 줄 모르는 열정, 젊은 세대들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는 옆에서 봐도 사뭇 숙연해질 정도이다. 그 선생님이 나를 유독 아끼는 계기가 있었다.
속기는 어렵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속기는 너무 쉽다. 기본편만 읽히면 누구라도 메모나 일기를 충분히 쓸 수 있다. 왜냐하면 한글 글자 20만자의 빈도수 분석을 통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보면 이건 완전히 외계인들이 쓰는 글자이다. 어디 메소포타미아문명 동굴에서 발견되는 약자 비슷한 기호의 나열이다. 요즘 누리꾼들이 쓰는 이모티콘을 떠올리면 된다. 그냥 호기심으로라도 홈페이지에 들어와보라. 이게 뭐지? www.namcheonsokki.com. 구시대 유물이라고? 멸종된 공룡의 운명이라고 함부로 치부하지 말자. 저토록 자기 돈을 들여가며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분은 확신이 있는데. 반드시 살아남아 명맥을 이을 것이라고. 이게 어떻게 만들 줄 아느냐고.
교재도 공짜인 데 교육수당까지 10만원을 빳빳한 신권으로 주신다. 홍자(횡재) 만났다. 물론 약법(略法)에 들어가면 점점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를 한자로 쓰면 모두 95획(95번 손동작)이다. 한글로 쓴다해도 52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속기 기본편으로 쓰면 13획이면 된다. 약법으로 쓴다면 6획이면 족하고 최종적으로 숙달된 조교가 쓰면 3획으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를 나타내고 속기를 배운 사람이면 금세 그렇게 읽을 수 있다. 통탄할 일이다. 특수기호가 자판에 없으므로 보여줄 수가 없다. 그래 홈페이지를 한번 들어가 구경해보시기를 권한다.
하기야 바쁜 현대생활에 무슨 생뚱맞은 속기냐면 할 말은 없다. 나같은 백수건달, 아니 자유인이기 때문에 그럴 염도 났고 배워본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훌륭한 일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름지기 배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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