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중국의 늙은 작가 왕멍(王蒙)이 직업란에 '학생'이라고 쓰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직업란에 당당히 '학생'(學生)이라고 쓰고 싶다. 요즘엔 평생학습이라는 말도 유행하지만, 배우는데 남녀노소가 어디 있으랴.
옛날에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장삼이사, 보통사람들의 신위나 지방에 '현고학생부군'(顯考學生府君)이라고 썼지만, 학생만큼 떳떳한 직업은 없다. 학생이란 말처럼 좋은 말이 어디 흔하냐. 듣기만 해도 풋풋하지 않은가. 영원한 청춘같고 늙음도 없는 것같고. 민머시기가는 '청춘예찬'라는 명문을 남겼지만, 나는 능력만 있으면 '학생송'(學生頌)을 한번 써보고 싶다.
그래서 최근 큰 마음 먹고(3만냥) 책을 두 권 샀다. 휴매니스트 간행 '살아있는 한자교과서 1, 2'가 바로 그 책. 정민, 박수밀, 박동욱, 강민경등 네 분이 엮었는데, 이만저만 재미있는 게 아니다.
또한 소파에 누워 실실 읽어도 기억에 남을 만큼 깔끔한 편집에 적당한 도안과 그림, 짤막한 화제박스등이 눈에 띈다. 판형도 커서 좋다.
내가 흥미있는 것은 한자의 어원(語源)이다. 영어로는 어원학을 etimology라고 하는 데, 그 단어가 생긴 유래를 찾아보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는 80%정도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한자로 이뤄진 단어가 전체 낱말중 75%가 된다나. 그만큼 순수한 우리말은 가뭄에 콩나기라는 얘기다.
대학시절 함석헌선생이 ' 어원학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한번 해볼만한 학문이네'라고 직접 말해준 기억이 난다. 그 단어가 생긴 까닭을 알아서 사용하는 것하고 모르면서 쓰는 것하고는 언중(言衆)생활에서 하늘과 땅 차이다. 오죽하면 '알아야 면장도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어느 특정 면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시치미를 뗀다'는 우리말을 생각해보자. 시치미란 몽고말로서 매사냥중 매가 도망하는 것을 막으려 꽁지에 주인이름을 써서 다는 장식을 이른다. 어디나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 있듯이, 남의 매의 시치미를 떼고 자기 매인 것처럼 한다. 어원이 이렇다보니 어떤 일을 해놓고도 마치 안한 것처럼 딱 잡아떼는 '오리발'族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매 중에서 가장 사납다는 송골매도 '송고르'라는 몽고말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매사냥이 원래 몽고에서 들어온 때문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을 보자. 어떤 일을 겪고 나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때 쓰는 말이다. 어처구니란 맷돌의 아래위를 연결시켜 주는 장치를 말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콩이나 곡식을 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지 않은가.
'뚱딴지 같다'에서 뚱딴지는 전봇대위에 달린 애자(碍子)를 말하는데, 전기를 통하지 않게 해주는 절연체이다. 그것도 모르고 초등학교시절, 돌팔매로 애자 깨뜨리기 놀이를 무던히도 했던 기억이 난다. 뚱딴지를 달면 전기가 통하지 않으므로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멍청한 사람을 가르킨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게 100년쯤 되니 생긴지 얼마 안된 단어이다.
'트집'이란 옻나무에서 옻을 채취할 때 나무껍질에 생채기를 내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는 나무에 트집을 잡으므로 '생트집'이라고 하고, 까닭없이 시비를 거는 것을 트집잡는다고 하게 되었다.
흔히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보자'고 말한다. 이때 산수갑산(山水甲山)은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잘못이다. 삼수와 갑산은 함경도 맨꼭대기에 있는 고장이름으로 조선시대 죄인을 귀양보내던 아주 춥고 험난한 곳이다. 이 속담은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배를 채우고 보자는 뜻이다.
연산군은 채홍사들을 시켜 전국의 '쭉쭉빵빵'들을 몇 천명 궁녀로 차출했다던가. 이들을 '흥청'(興淸)이라고 불렀는데, 매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헤매다 쫓겨났다. 이를 '흥청망청'이라고 했다. '흥청거리다'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소시적 아버지에게 들은 말중에 '풍신같은 놈' '풍신이 밥값허네' 가 있다. 이때 '풍신'은 정설은 아닐지 모르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을 먹으려다 결국 제가 먼저 죽은 풍신수길을 빗댄 말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영부영'을 생각해보자. 혹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지 거북이가 헤엄치는지 헷갈린다는 뜻으로 '어영구영'(魚泳龜泳)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설명이다. 조선시대 군영(軍營)으로 '어영청'(御營廳)이 있었는데 구한말 軍紀가 아주 개판이 되어 오합지졸에 불과하게 된 것을 비아냥댄 '御營非營'에서 나온 것으로 발음의 편리를 따르다 변한 말이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영아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중에 하나가 '에비'일 것이다. 지역에 따라선 '이비' '이비야'라고 한다. 이 말은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남원성과 전주성에서 조선사람 코나 귀를 잘라간 데서 유래한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직한 추억이다. 일본 어디엔가 '이총'(耳塚:귀무덤)이 있다잖은가. '이총'의 영령들을 봉환하는 작업을 추진한 스님도 있었다. 그때 왜병들을 '코 베어가고 귀 떼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이비야'(耳鼻耶)라고 불렀는데, 耶자는 '남자'를 뜻한다. 당시 울던 아이들에게 '호랑이가 온다'든지 '곶감을 준다'든지 하는 것보다 '이비야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던가.
이런 成語들의 유래를 읽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한가지만 더 말하자. '흐지부지되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 말은 순 우리말 같지만 '휘지비지'(諱之秘之)가 변한 말이다. '휘'는 꺼린다는 뜻이다. 죽은 사람이나 높은 이의 이름을 가르키기도 한다. '비'는 비밀로 감추어 숨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휘지비지는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꺼려져서 드러나지 않도록 감춘다는 의미다. 소리나는 대로 적다보니 결국 '흐지부지'가 되어 그 의미도 '흐지부지'될 정도로 잊혀진 것이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예전에는 부모의 이름자를 입에 함부로 올리지 않았다. 임금의 이름자도 절대로 쓸 수 없었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이 도(李棹)로 외자인 데, 꼭 써야 되는 경우에는 발음이 같은 다른 '도'자를 쓰는 것이다.이런 것을 기휘(忌諱)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이름자를 입에 올릴 때는 '무슨 자 무슨 자를 쓰십니다'고 말해야 한다. 성씨 다음에는 '자'를 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버지 이름자가 '홍길동'이면 "제 아버님은 홍, 길 자, 동 자를 쓰신다'고 해야지 '홍 자, 길 자, 동 자'라고 하면 안된다. 자기 이름을 말할 때도 '임, 꺽 자, 정 자'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똑똑한 유치원생에게 물어보라. 거개가 아버지 이름을 물으면 성(姓)씨 다음에 '자'자를 붙이는데, 이것은 부모가 무식한 탓이다. 이런 것들도 흐지부지되면 안된다.
아무튼, 이 책은 이런 成語들의 유래로부터 기억에 남기 쉽게 한자를 익힐 수 있다. 오늘은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마음을 살찌운 유익한 날이었다.
마음을 살찌우는 계절, 심심풀이 삼아(killing time) 공부해보자. 아이들도 오랜만에 책상에 앉은 아빠의 뒷모습에 흐뭇해하지 않을까.
배워서 남 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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